이찬성 본지편집위원

(특별기고)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을 말함이요, 지혜는 사람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슬기로움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없는 사람도 지혜는 있을 수 있지만 지혜가 있다고 반드시 지식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혜가 없어도 지식은 있을 수 있고, 지식이 없어도 지혜는 있을 수 있다.

지식도 지혜도 인간에게는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지혜가 인간됨됨이를 나타날 때가 많으므로 이를 더욱 아끼는 경우가 많다. 옥은 다듬어야 빛난 다 ‘나는 왜 사는 가’ 또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가 스스로 반문할 때가 있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이를 비약 하여 나 는 느낀다, 고로 존재 한다. 또 한 종교인은 나는 신앙 한다. 고로 존재 한다. 나아가 고난을 통해 나는 성장 한다로 이어진다. 고난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또 이를 통해 지혜로운 삶을 영위한다. 지혜는 정상적일 때보다 비정상적일 때에 얻어진다. 사람이 태어나 순풍에 돛단 듯이 일생을 지낸다면 지혜는 얻어지기 어렵다.

고통을 당했을 때만이 이를 뚫고 나가려는 지혜가 생긴다. 그래서 훌륭한 선장은 험한 풍랑이나 모진 비바람을 겪어야 비로소 지혜로운 선장으로 성장한다고 했다. 솔로몬 왕에게 한 아이를 놓고 “모두 내 아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이 나타난 송사가 들어왔다. 두 어머니 모두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해 진짜 어머니를 가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시퍼런 칼을 주고 그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명령했다. 이 때 한 어머니가 자기 권리를 포기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임을 인정했다는 지혜로운 판결이 오늘 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소산 이다. ‘소량의 지혜가 1만 냥의 가치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정보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세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 열 배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요구되는 지혜의 범위는 점차 증폭되어 가지만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때때로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좌절할 때가 많다. 나무에 가위질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역경이 있다.

그러나 그 역경을 이기고 오히려 출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재기불능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린다. 역경을 이기고 일어선다는 것은 역경 그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지혜로운 인간승리 그 자체인 것이다. 요즘 청소년 범죄행위가 날로 포악해지고 잔인해지며 증가하고 있어 비관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말세론까지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옥은 다듬어야 빛나듯이, 사람도 배워야 사리판단 능력이 생긴다. 그러나 또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위태롭다고 하였으니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은 깜짝 놀라게 하는 지혜는 없고 지식은 넘쳐흐르고 있다. 모르는 것 빼놓고 모두 안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세상사 모르는 것이 없다. 지식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아 사람 살아가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세상을 모두 지식으로만 판단하려고 하여 이 사회는 몹시 시끄럽다. 그보다는 지혜롭게 대처하는 슬기가 필요 할 때이다. 깨우쳐가는 진리에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것이 현명한 인생으로 통하는 옳은 길이 아니겠는가. 보다 슬기롭게 살아가자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에 비하여 훨씬 유익한 일인데도 이런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위한 용기가 없으므로 자기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지혜를 구하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이는 한 가지 일을 경험함으로써 한 가지씩 지혜를 늘려간다는 뜻이다. 이런 생활 속의 지혜도 축적되어 많이 알면 여유가 생길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지혜는 바로 행동으로 얻는 지식이기에 더 더욱 보람된 것이다. 좀더 지혜롭고 슬기롭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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